-->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11:2-6

 

예수 이름으로 생명을 얻었는가?
예수 안에서 소망을 찾았는가?
예수 이름이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가?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고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례적인 대답이 아닌 영혼의 울림이 있는 대답을 이끌어 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면 위와 같은 질문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예수님의 답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요한은 누구일까?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이며, 요단 강에서 침례를 행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며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불과 같은 설교를 하던 사람입니다.

그 후에 헤롯 왕이 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던 일이 있었는데, 이 일에 대해 요한은 신랄하게 비판하다 현재는 투옥된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 질문은 매우 중대한 질문입니다. 질문의 뜻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의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뜻은 자신의 기대와 예수님의 행동이 다름으로 당황하는 모습입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대했던 이유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 주기를 바랬습니다. 요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는 당장이라도 헤롯을 대면해서 그를 꾸짖고 왕좌에서 쫓아 내리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가만히 들어보니 자신이 기대하던 바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눈 먼 자, 못 걷는 자, 못 듣는 자,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과연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그 이가 맞다는 말인가?’

요한은 자신의 기대에 빗나가자 의심하고 실망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의 기대와 하나님의 응답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관심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에 대한 여러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예는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원한 바는 중풍 병이 치료받는 것이었기에 예수님께 병의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자여 안심하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며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구하던 것과 다른 것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으로 더 큰 축복을 누리게 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세상적 성공이나 하나님의 응답은 영혼의 잘 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응답을 원하나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생각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답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실족하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다’ 또는 ‘시험에 든다’는 뜻인데요, 예수님 믿고 그 이름으로 인해 시험에 들고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기쁨과 평강을 맛봅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죄와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롬6:14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는 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잠깐의 승리도 있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죄의 자리로 이끌려 갑니다. 이때 우리는 그동안 누리던 기쁨과 평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마치 한때에는 회개를 선포하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던 요한이 옥에 갇혀 절망 가운데 있듯이…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며 절망스러운 자기 고백을 합니다. 이 곤고함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낼 수 있 단 말인가?

‘사망의 몸’이란 로마시대 최악의 형벌 중 하나가 바로 사망의 몸이란 형벌입니다. 이미 죽은 시체를 형벌에 처할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꽁꽁 묶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형벌을 받는 것같이 끔찍하며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좌절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힘 겨운 싸움 속에 몸부림 칠 때, 바울은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예수의 이름이 사망의 줄에 묶여 있는 나를 풀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맛보는 좌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짓는 죄 또한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까지는 이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약속은 우리들의 몸이 무덤에 들어가 썩어도 변하지 않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은 우리를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 결국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들로 서게 만들 것입니다.

힘 겨운 싸움 속에 몸부림 칠 때가 있지만 우리도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되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신음하는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을까?

요즘 우리 나라뿐 아니라 온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지럽고 소란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 방식(태도 또는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마11:29)

그리고 마12:15-21에는 ‘보라 여기에 내가 택한 나의 종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종, 내가 기뻐하는 종이다.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가 나의 정의를 온 세상에 선포할 것이다.

그는 따지지도 않을 것이요, 소리높여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 누구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의 심판이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을 것이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을 마태가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압력을 받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 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따지거나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치유하셨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집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나의 삶의 방식을 내려 놓고 예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지혜를 내려 놓고 주님의 지혜를 받아 들이는 것, 나의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기대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기대를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영혼의 쉼, 하늘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