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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 장 22 - 23절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천국가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관계성의 위기, 건강의 위기, 사업의 위기, 직장, 가정, 교회, 신앙의 위기...

우 리는 바다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잡아 끌어 올려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물위를 걷고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야만 겨우 한 걸음을 걸어 가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순간이 그져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적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오늘 함께 읽은 본문도 보시면 시편기자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많은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12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우리도 시편기자가 발견한 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재물 뿐이겠는가... 돈으로 막강한 권력얻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듯...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3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경건한 삶을 살고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했던 일들이 참으로 헛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여러분이 경건생활을 잘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조소의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복음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기 성찰을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고통 가운데 성소에 들어 가게 됩니다.
성소 안에 들어간 그가 크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22절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서 짐승이오나’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보니,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둘째이고 자신이 우매하고 무지하며, 마치 짐승과 같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시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로 이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요즘 공개된 인터넷 공간을 가득 채우는 내용을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의 글들이 너무 많지않나 생각됩니다. 그들이 공부하는 이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지식의 칼을 갈고 있지 않나
그들이 지적대로 세상에는 불 합리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먼저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가 이 문제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아를 철저하게 무너져 내릴 때, 비로서 발휘 되기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12장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말했죠.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변화됩니다.

둘째 교훈, 복음이 주는 소망을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소망은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발견한 복음의 내용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들어 '교회'에 관한 예기를 해봅니다.
이 땅의 소망이 있는 곳은 교회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죄의 영향을 받으며 수많은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교회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믿음... 바로 이것이 복음이 주는 소망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 속에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들이 생긴다고 하나 복음이 주는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넉넉히 구원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23절에 중요한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독일어 성경을 보면 23절이 ‚Dennoch bleibe ich stets an dir‘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와 함께있다’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Dennoch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요한 단어가 생략됬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주앞에서 우매 무지한 짐승’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깨닫고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제 쓸모없는 존재야. 오늘부터 끝장이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시편기자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은혜... 주께서 우리의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안아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심각한 형편에 놓여질때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에도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다른 세력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이 세상이 크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스러워 지기도 합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고난가운데 있었던 욥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스러워 하던 그였습니다.
욥기 38장에는 그런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지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있었느냐, 네가 깨달았거든 말할 지어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자가 누구냐
네가 너의 날을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알려 주었느냐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어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

폭포수같이 쏱아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질문 앞에 욥은 딱 한마디 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은 자신이 안다고 하였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비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욥에게 이것이 새로운 축복의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우리가 어떤 절망의 상황 가운데 처해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소망의 문은 언제든 다시 열립니다.

결론

복음이 주는 능력과 복음이 주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분별하는 좋은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성도입니다.

조그만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너무 싶게 낙망하며 가던 길에서 멈춰서는 분들이 많습니다. 늘 상황에 이끌려 다니기 보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상황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힘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힘들때 마다 주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