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호

꽤 오래전의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야기 해 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 정도 지난 일이네요.
우리는 종종 거리에서 허름한 사람 혹은 지저분한 거지를 마주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불쾌감을 일으키고 만일 그들에게서 냄새라도 난다면 등을 돌려 도망가거나 다혈질인 사람은 불쾌한 인상을 드러내며 욕이라도 한마디 할 수도 있고요. 또는 어떤 노인이 지쳐 힘겹게 겨울 거리 벤치에 앉아 있고, 그의 발은 동상에 걸렸는지 많이 상해 있는 것을 보았다면,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거나 좀 더 용기가 있다면 한두 푼의 돈을 쥐여 드릴 수도 있고요.
여하간 이러한 모습을 보는 우리는 불쾌함이건 안쓰러움이건 불편함을 느끼며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동네 길을 걷다 보니 튤립 꽃봉우리가 거리 화단에 올라오고 있더군요. 몇 년 전 우리 집 앞 아파트 공동 화단에 수본이 수빈이가 엄마하고 심어 놓은 튤립도 함께요. 봄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우리는 더 큰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송네피오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가까이는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등을 시간을 내서 찾아가는 것은 그 아름다움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과 나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행이지요.

그만큼 아름다움은, 아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행복한 내 삶을 유지해주는 소중한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삶에 지치고 고통스러울 때, 더욱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워합니다.
아! 뜬금없지만 저는 우리 교회 예배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벽에 걸린 소박한 나무 십자가더라고요.

10년 전에 한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기억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 첫 번째 복이지요. 만일 제가 서점에서 그 책의 제목을 먼저 보았다면, 분명히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당시 인터넷을 통해 책과 함께 제작된 동영상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아니 충격-으로 인해 한국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책을 구해 직접 읽어 보았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최춘선 할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 구원"이라는 종이 팻말을 붙인 머리에, 허리는 굽어 있었고,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은 더럽고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젊은 처자를 보면 "당신은 유관순", "당신은 아름답습니다"라고 황당한 말은 던집니다. 가끔 힘들면 지하철 바닥에 맨발로 쭈그리고 앉아서 쉬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키득거리거나, 시끄럽다고 소리치거나, 다가오면 도망가거나 아니면 안쓰러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제가 최춘선 할아버지를 마주했다면, '아! 제발 나에게 오지 마라. 미친 노인네야'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외면했겠지요. 아니 20대였다면, 분명히 욕지거리를 날렸을 거예요. 늘 그래 왔으니까요.

동영상이 흘러갈수록 동상으로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혀 일상적으로 구역질이 났을 그 발의 모습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발로 변해갔습니다.
동영상이 끝이 났을 때, 저의 마음은 무엇인가 꽉 들어차 나를 누르고 있는 무게감에 숨이 멈추어졌고,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남자가 말입니다.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험은 낯설고 생소합니다. 오히려 당혹스럽습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이 나와 충돌해서 굳혀져 있던 나를 깨뜨립니다. 당혹스러운 이유는 익숙한 내가 깨지고 내가 새로운 곳에 아니 낯선 곳에 놓이게 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생소함, 당혹, 불안함은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발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통해 행복을 느꼈습니다. 내가 변태가 되었나?

내가 깨지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며 보통 내가 가진 것, 아니 나 자신 자체의 상실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공포감을 갖게 됩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공포감. 저는 인정받기를 원하며 살았습니다. 내 존재의 크기, 내 존재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멋있어 보이고자 했고, 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힘 있는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다녔습니다. 힘과 아름다움에 다가갈수록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가갈 수 있을 뿐, 힘과 아름다움은 나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의 발은 나를 깨뜨리고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 발의 아름다움을 통해 저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의 발을 통해 저는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가 궁금하시죠. 직접 한번 만나보세요.... 지금은 천국으로 가셨지만. 인터넷에서 아직 찾아뵐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자기가 체험해야 합니다.

참! 예배실의 나무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저처럼 투박하게 깎여있기 때문이에요. 화려하지 않고 비대칭적인 소박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다른 십자가에서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작고 서툴고 허술해 보이는 우리 교회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요.